시야가, 다시 한 번 새하얗게 밝아졌다가 어둠 속에 잠긴다.

"아아아악-!!"

입에서 토해져나온 붉은 액채가 시야에 들어온 뒤에야
귓가에 울리는 웅웅거리는 기계의 소리와,
가시가 몸을 관통하는 듯한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아아,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이런 삶따위.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
마지막에 그 빌어먹을 영감이 죽는 꼴을 보기전엔 안 죽어.

"크으..... 흐으......"

"이 정도 반응에도 안 죽을 만큼, 근력 강화실험
준비단계는 어느 정도 된 것 같군." -연구원1

단순한 불로불사가 아닌, 강한 힘과 속도.
그 녀석은 역시 군인을 만들 생각이었던건가.
그래봤자, 이제 와서 생각해도 소용없는데. 난 왜.
그런 생각을 반복하다가 나는 입안에 고여있던 피를
그나마 남은 힘을 써 특기를 이용해 빼내었다.
역시. 주사와 약, 그리고 이 족쇄가 있는 한은 내 특기로도 이게 한계인가.

"이봐, 피아. pia-01." -연구원1

연구원이 나를 부르는 그 이름에, 나는 눈살을 찌뿌렸다.
아냐. 내 이름은 그런게 아냐. 저건 저 녀석들이 멋대로
나에게 붙인 실험체의 이름이다.
유토피아(Utopia).즉, 이상향. 나를 이용하여
이상향을 이루겠다는 그 미친 영감이 뒷글자의 '피아'(pia)를 따서 만든 내 실험체로서의 이름.
그러니 싫을, 아니. 혐오할 수 밖에.

"피아? 살아있나......" -연구원1

"닥쳐......그 딴 이름으로... 부르...지... 마...."

목소리가 아직 잘 나오지 않는다.
몇 시간씩이고 고통에 비명을 질러댔는데 멀쩡하면 이상하지.
이런 생활도 어느덧 한 달이 다되어간다.
언제 죽어도 모를 수많은 혼혈들. 요 몇 일 동안
죽어나간 혼혈만 해도 한 둘이 아니다.
나도 저렇게 되는 건 아닐까- 라는 두려움따윈 접은지 오래.
그저, 내가 두려워하는 건......

'벌써... 한 달인데......'

내가 그들의 기억속에서 마저 죽어버렸을까. 그 생각을 할 때 뿐이다.

그렇게 숨소리가 점차 안정되어가자, 연구원이 다시 말을 건다.
듣기 싫어서 무시한 채 나는 언제나처럼 눈을 감아버렸다.

"아래쪽 연구시설에 문제가 생겨서, 다른 실험체와
잠시 방을 같이 좀 써야겠다." -연구원1

하지만 이내 그 말에 눈을 다시 떴다.
실험체? 게다가 아래쪽이라니?
그렇다는 건 여기말고도 또 있다는 이야기.
혹시 선생님과 오빠도 이런 연구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
아니, 오빠는 몰라도 선생님은 아셨겠지.
선생님의 특기가 힐링인 이상, 소장이 써먹지 않을리가.

"행여나 싸우는 일은....." -연구원1

"댁이랑 싸우기 전에, 나가."

연구원은 한숨을 쉬며 나가버렸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것 같아?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난 10대에 수석으로 연구원이 될
자격까지 얻었다. 그 인간이 싫어서 선생님의 조수로 있었던 것 뿐.
이 정도 실험이 뭘 의미하는지는 알 수 있단 말이다.

'조금만 더. 더 버티면.'

일부러 특기를 억제해 특기의 위력이 약한 것 처럼 그들 눈을 속이고.
완력이나 속도를 키우는 실험에서도 일부러 준비 단계정도만
끝난 것처럼 힘들게 그들을 속여왔다.
언젠가는, 이 유리벽따위. 이 족쇄 따위.

그리고, 그 빌어먹을 녀석의 목까지-

"피아. 새 실험체다. 충돌일으키지 말도록." -연구원2

등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두 명 정도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문이 닫히는 소리도 이어서 들렸다.
어떤 녀석일까. 얼마나 아팠을까. 혼혈? 인간?
그렇게 신경쓰지 않으려던 나는 결국 일어나서 뒤를 돌아보았다.

"아.........."

내 뒤에 서있는, 검고 하얀 한 녀석.
눈 색이 검은색으로 가득 찬, 작은 남자아이.

범고래 혼혈의 한 어린 남자 아이였다.
그들이 아닌, 당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