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나버렸다.' -긴토키

겨우 잊혀져가고 있던 느낌이. 되살아났다.
불쾌하고 뜨거운 그 검붉은 피가
몸을, 손을, 그리고 이 검을 적시면
자신도 모르게 이 적안이 흔들려오고
손에는 힘이 들어가며 근육과 살점을,
그 목숨을 도려내는 그 느낌에
미쳐가던 자신의 모습이, 다시 생각나버렸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생각나버렸다.
그들의 손에 머리만 돌아온 그 분.
시체파먹는 귀신이라 불리던 자신에게,
자신을 지키는 검이 아닌
타인을 지키는 검의 무게를 알려준
그 분의 마지막 미소가 기억나버렸다.
동시에 자신의 앞에서 죽어간 전우들도.
모든 것을 앗아가버린 그 하늘에
울부짖으며 야차처럼 검을 휘둘러보지만,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아버려서.
그저 미친 듯 날뛰던 자신도.

그리고...... 내 앞에서 떨어져내렸던 그녀도.
차마 잡지못했던 그 손과 눈물이 맺힌 검은 눈동자가
아직도 눈 앞에서 아른거린다.
너희들 때문이다. 너희 같은 더러운 자식들만 아니었어도 (-)는......!!

"하아....... 하아........" -긴토키

정반대의 상황이 되어버렸다.
수많은 시체 위에 서있는 것은, 이제 나 뿐이었고.
하얀색이던 그의 몸에 다시금 붉은 색이 들러붙어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다가 겨우 그 숨을
진정시키고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 눈은, 다시 탁해져있었다.

"짜증나게........." -긴토키

더 이상 눈이 내리지 않자,
나는 아까까지만 해도 춥다며 투덜거렸지만
지금은 어째선지 짜증을 내고 있었다.
왜. 어째서 지금 그치는 거야.
어서 이 모든 흔적을 그 새하얌 속에 지워. 지워. 전부 지워버리라고.
잊고 싶었던 내 모습까지, 이 쓸모없는, 부질없는 생명까지.
덧없이 하얗게 덧씌워줘.
그렇게 애원하며 얼굴에 묻은 피를 손가락으로 훑어낸다.
그런 손가락에 따뜻한 것이 와닿았다.
투명한 그 액체가 자신의 눈물이란 걸
깨닫기 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긴토키」

따뜻한 눈물이 손가락에 스며들자 과거 기억의 파편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지금 보다 더 추웠던 겨울날,
마당에 쌓인 눈과 겨울바람에
추워서 나가지 않던 나에게
다가와선 씨익 웃어보이던 그녀의 목소리가.
그 작고 따뜻한 손이 자신의 작은 손을
잡았을 때의 온기는, 너무나 따뜻했다.

「긴토키는 하얘서, 눈이랑 잘 어울리네.
나는 검정색이라 반대지만.」



그 어린 날의 그녀는, 너무나 어려서 그런말을 내뱉었던 걸까.
하얀색이 잘어울린다는 그녀와 다른 친구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것도, 어려서 그랬던 걸까.

'거짓말.' -긴토키

따뜻하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추워. 너무나도 춥다고.
전혀 따뜻해지지가 않잖아, 제길.
차가운 것도 따뜻한 것도 모르겠던 세계에서
빠져나와 그 한기와 온기를 느껴버려서.
그리고 그 맞잡던 손의 온기는, 눈물과 피조차도 대신할 수 없어서.
뼈가 시리도록 추웠다. 추위에 떨리는 온몸이 외친다.

외로워- 라고.

'거짓말이다. 전부.' -긴토키

하얀색이 어울린다는 말도, 거짓말이다.
하얀색은, 깨끗하다는 말이지만.
지금의 나는 전혀 깨끗하지 않아.
눈에 뒤덮혀 하얀 세계에서 혼자
검붉은 색으로 더러운 것도 모자라,
하얗던 주위마저 더럽게 물들여선.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역겨움에
그는 검을 한 번 휘둘러 피를 털어내었다.
자신에게서 느껴지는 역겨움이,
이 녀석들에게서 느껴지는 역겨움보다 더했다.

"............한심하게." -긴토키

다시는 엮이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면서.
또다시 그 비린내와 검의 마찰음에 도취되어선 검게 물들였다.
나는 피에 물들어버린 새하얀 유카타를 보다가,
갈아입어야겠다는 생각에 불타버린 집을 스윽 둘러보았다.
그러던 도중, 구석에 숨어있던 한 어린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 아이는 흠칫하였고,
나는 그 아이를 흐릿한 눈으로 보다가 이내 그 시선을 거두어버렸다.

'마음에 안든다고. 저 눈.' -긴토키

저 눈은, 날 미치게 만들어. 괴물을 보는 듯한 저 눈이.
다른이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자신의 백야차라는 이름도,
나를 충분히 미치게 만들었다.
양이지사들에게 영웅이라 불리우는.
동시에 천인들에겐 괴물이라 불리우는.
그 이름의 무게를 완전히 벗어던지기엔,
아직 저 눈이, 저 시선이 두려웠다.

그녀는 얼마나 더 두려웠을까.
모두에게 들키고, 얼마나 괴로웠을까.
혹시 그로인해 그녀가 죽은 거라면, 나는......

'.........가자.' -긴토키

그렇게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지만, 그저 쉬고싶었다.
아무 걱정없이, 그저 멍하니.

너는 이런 나라도 감싸안아주었는데.
모두를 대신해 그림자처럼 모든 것을 감당했는데.
나는 그런 너의 진짜 상처를 한 번도 끌어안아주지도
않은 채로 이렇게......

아아, 오늘따라.

"(-)......" -긴토키

그녀가 너무나도 보고싶다.


살기를 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