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몸이 움직이지를 않는다. 하긴. 비에 쫄딱 젖었으니.
입에서 비릿한 피의 맛이 느껴졌다. 상처가 터진걸까.
손목은 이미 묶인지 오래. 그냥 밧줄이라 내 힘으로도 끊을 수 있다.
하지만 비에 젖었더니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흐리던 시야가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시야가 돌아오면 뭐해. 보이는 건 암흑 뿐인데.

"그 여자는, 아직 자고 있나?" -???

그 때, 귓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와닿았다.
분명 그 배신 때린.... 아니지. 원래 동료도 아니었지.
아무튼 그 자식의 목소리에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거래하기로 한 쪽은?" -???

"지금 오고있다고 합니다." -???

근처에 있는 흑호 단원들이 아까 그 녀석에게 존대를 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저자가 단장 쯤 되는 것 같다.
잠시 자는 것처럼 숨소리를 줄이고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 참. 생각보다 굼뜬 자들이군." -???

저 자식들, 다른 사람들도 끌어들일 셈인걸까.
여기서 내가 막는다면 좋겠는데, 아직 힘이 덜 돌아왔다.
손이라도 자유롭다면 이 정도 힘으로도 어떻게든 할 텐데.
밧줄 같은 종류로 묶은 것 같다. 평소같으면 그냥 끊을 수도 있지만,
물에 젖은 데다가 팔이랑 손목에 상처가 있다.
자면서 무의식적으로 밧줄을 끊으려다 생긴 듯 싶다.

'잠깐.......!'

그 때 나는 무언가 허전함을 느꼈다.
검이, 없다. 뒤늦게 알아챈 나는 흠칫하고 말았다.
어떡하지. 저 녀석들이 가져간 걸까. 안돼. 내 목숨을 잃더라도
그것만은 다시 잃을 수 없단 말이야.
유키가 남겨준 마지막 유품이자 쇼요선생님께서
내 신념을 새겨주신 거란 말이다.

"단장님, 이 여자 깼는데요?" -???

"뭐, 벌써?!" -???

젠장, 들켰다!
아까 흠칫한 것이 화근인 듯 하다.
더 이상 자는 척 하는 것도 무리라 생각되어 나는 눈을 부릅떴다.

"분명 등을 그렇게 크게 베였는데.
죽지 않은 것도 신기한데 이렇게 금방 깨다니.
실례지만 어디 출신......" -???

"닥쳐라. 너랑 말 섞고 싶지도 않으니까."

내가 밧줄에 묶인 채 주저 앉아있으니까 안 무서운가보지?
이것들을 확 그냥.....

"뭐, 천인이라는 건." -???

손목에 피가 나긴 할테지만 무리해서 밧줄을 끊으려던 나는,
그 녀석의 다음말과 그 녀석의 손에 쥐어진 물건에 행동을 멈추었다.

"이 칼날의 색만 봐도 알겠지만요." -???

"너 그거........!"

내 검을 보며 씨익 웃는 그 녀석.
나는 안간힘을 썼지만 생각보다 잘 끊어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조급해져서 그런 듯 하다.
그 자식은 발버둥치는 내가 재미있다는 듯 쿡쿡웃더니
확 싸늘해져선 나를 발로 한 번 걷어찼다.

"콜록 콜록........"

"으음. 피가 검은색인건 착각이 아니었나 보네요." -???

저 자식이..... 그렇게 거의 끊은 밧줄을 완전히 끊어버리려던 그 찰나,
녀석이 반대쪽 손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나저나 이 낡은 서책은 뭐죠?
천인이 양이사상을 배웠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이딴 서책이 뭐라고......" -???

나는 그 말에 다시 손을 멈추었다.
이딴.....? 이딴.... 이라고.....?
내 신념과 검도, 그리고 내 동료들도 짓밟으려 했던 주제에.
네가 뭔데? 네가.... 네가 감히.....

"쓸데없이." -???

그 녀석의 손에, 책은 그렇게 갈기갈기 찢어져 바닥에 떨어졌다.
키득거리는 녀석들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포화해 머릿속에 울려퍼진다.
이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검은색이 다시 나를 침식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래. 나는 아직도 이 느낌을 기억한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죽였던 날. 타이치의 명령으로
모든 것을 베었던 그 날이었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고, 정신도 날아가버리는 것 같은. 그 느낌.
감정을 죽이는 것도 그 때부터 였다. 그런 감정을 되찾아준 건,
유키와 쇼요선생님. 그리고 친구들.

하지만 이젠 그들은 없다. 친구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다시 만난 자들도, 지금 위험해 처할지도 모른다.

"음? 저기요? 당신 죽은 건가요?" -???

".............."

"왜 아무말도 없......!" -???

그러니, 나는-

"컥........!" -???

"그냥........"

투둑하고 밧줄은 끊어진지 오래.
내 이성도, 끊어진지 오래.
괜찮아. 괜찮을거야.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리지만, 괜찮아.

어떻게든 너희를 지켜내보일거니까.
그리고, 날 검은 그림자에서 꺼내 준 것도, 너희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죽어."

이미 버려버린 나 자신을 다시 주워담아도. 괜찮아.

.......아마도.

맑게 갠 하늘에, 다시 또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