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 뒤
메마른 대지에 울려퍼지던 빗소리와 함께 그 대지에 스며들던 피비린내는 사라졌다.
그렇게 긴 시간동안 싸워오던 메마른 대지를 벗어나 오랜만에
발에 닿는 잔디와 풀의 감촉을 느끼니 왠지 모를 한숨이 나왔다.
전우들의 묘비대신 대지에 박아놓은 검들의 숲을 빠져나와 절벽까지 다다랐다.
아래가 강인데도, 나는 아무런 위화감 없이 절벽 끄트머리 쪽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높아.......'
높아. 짜증나도록 높아.
너무나 높아서 아무리 손을 뻗어도
이미 하늘로 떠나버린 소중한 자들에게는 이 작은 울림조차도 닿질 않아.
전쟁 도중 떠나가버리신 쇼요 선생님. 수없이 죽어나간 전우들.
그리고 전쟁에 휘말려 이유없이 죽은 자들. 더 이상 그들에게 닿는 것은 없다.
피의 붉은 색을 검은 그림자에 물들인 채
울부짖던 내 목소리는, 닿았으려나. 하지만 이제 그 그림자조차도 없어졌다.
빛이, 보이질 않는다.
"하아...... 여기저기 쑤시는 구만."
나는 입고 있는 검은 유카타 자락 아래에 감추어진 상처를 힐끗 보며
할아버지가 비온 날 삭신이 쑤신다는 듯한 말투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짜 힘들다고. 물에 약한 내 자신이 다시 싫어지려했다.
"슬~ 돌아가야겠......"
그런 나의 머리를 갑자기 위에서 손으로 꾸욱 누르며 다시 주저앉히는
누군가의 힘에 나는 짧은 비명을 내며 잔디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정수리를 어루만지며 고개를 뒤로 돌려 내 옆에 서있는 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익숙한 담배향과 보랏빛 머리칼. 그리고 이젠 한쪽 뿐인 녹안.
"뭐하는거야, 신스케!"
"니가 백 살 먹은 영감이냐. 삭신은 무슨......" -신스케
"그.... 그래서 뭐......."
타카스기 신스케.
그는 보라색바탕에 노란 나비가 수놓인 유카타를 입은 채 곰방대를 입에 물고서 특유의 웃음을 낮게 지어보였다.
나는 헝끌어진 머리를 정돈하다 피식하고 한숨을 내쉬며 다시 앞을 보았다.
"잠시 합석 좀 하지." -신스케
"합석이고 뭐고 간에, 나 방금 돌아가려 했...."
신스케는 다시 내가 일어나려 하자 팔을 잡아당겨 앉혔고
내가 그를 노려보자 오히려 그는 큭큭 낮게 웃으며 내 옆에 털썩 앉았다.
나는 툴툴 거리긴 했지만이내 다시 앞을 보았다.
그리고는 다시금 멍하니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는 나다.
하늘의 태양빛이 왜 오늘따라 하얗게 보이는 걸까
너무나도 하얘서, 하얗게 침체되는
그 햇빛에 사라져버릴 것만 같다.
다른이의 손을 잡아도 잡은 것 같지 않고 그렇다고 놓으면 내가 검은 연기가 되서
사라질만큼 난 약하다.
육체적으로 강하면 뭐해.
'정작 정신적으로는 전혀 성장하지 못했는데.'
어쩌면 나는 다른 이를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우고선
아무런 결과도 낳지 못하는 싸움을 해온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피를 뒤집어쓴 걸지도 모른다.
그래봤자 비에 씻겨진 뒤 푸른 하늘 아래에 서면, 나는 또 다시.........
"..........이젠 시시한가? 그림자 아가씨." -신스케
그런 내 귀에,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던 신스케가 내뱉은 말이 날아든다.
나는 옅게 미소를 띠었다.
"너야말로, 성불 못해서 시시한가? 귀신양반."
내가 그의 물음에 장난식으로 되받아치자 그는 물고있던 곰방대를
손으로 들고서 연기를 하늘로 뱉어내었다.
".........(-)." -신스케
"또 뭔데. 할 얘기 없으면 그만......."
내가 약간 짜증을 내며 신스케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땐,
그는 어느덧 일어서있었다. 그리고는 나를 내려다보며 나지막히 읊조렸다.
"나는 다시 귀병대.
또다른 나의 부대를 만들어,
이 썩어빠진 세상을 부수려고 하고있다." -신스케
그 한마디에, 나는 다시 멈춰버렸다.
납빛이 내려앉아도 언젠가는 다시 푸르게 빛나는 저 하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