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몇 번의 여름이 더 지났다. 하늘은 더 푸르게 변해갔다.
한 가지 변한 것이 있다면, 이젠 하늘에서 쉽게 배를 볼 수 있다는 것.
막부와 천인이 끝내 손을 잡았다. 나는 비록 천인이지만,
인간의 편에 섰다. 그리고 천인인 사실을 최대한 숨겼다.
뭐, 이젠 숨길 필요도 없으려나. 몇 년 사이 많은 것이 변했다.
"...............누님." -소고
"....................."
"언제까지 그러실 생각입니까." -소고
"..........몰라."
마루에 앉아 가만히, 아무말없이 있는 내 위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소고였다. 이젠 나보다 커버려서 꼬마라고도 못하겠다.
내가 입을 삐죽 내밀고 있자 소고는 내 옆에 털썩 앉았다.
"나 참. 곤도 씨도 안보이고 누님도 이러시면 저보고 어쩌라는겁니까." -소고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폐도령이 내려진 뒤. 곤도 씨는 모습을 감추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말도 잘 하지 않았고, 앉아서 멍하니 있는게 고작이었다.
'.........빌어먹을 놈들.'
내 검을. 빼앗겼다. 유키가 내게 남겨준 그 검을. 목숨과도 같은 것을.
그런데 어떻게 가만히 있으라고만 할 수 있어.
같은 천인이지만 역겹다. 너희들이 짓밟은 것은, 사무라이의 혼 그 자체.
내 영혼과 그녀의 영혼, 쇼요 선생님의 영혼, 그리고 떠나간 전우들의 영혼.
너희는 모든 것을 앗아가고도 계속해서 앗아가는거냐. 어째서.
"그러다가 쓰러집니다?" -소고
"안 쓰러져. 소식한다고 안 죽는다고."
입맛도 없다. 분노로 이가 바득바득 갈리는 데도,
검 한 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빼앗겼다. 그런데 밥이 넘어갈리가 없잖아.
내가 검을 회수하려고 온 녀석들에게 검을 겨누려하자 곤도 씨가 막았었다.
죽어도 내가 죽는다고. 왜. 왜 막은 거에요.
"그 검이 그렇게 소중해요?
나 또는 미츠바 누님, 다른 사람들보다 더?" -소고
소고의 그 말에 나는 속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말 한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너는 모를거야. 그 누구도 내 편이 없는 그 곳에서 살던 내 어린 날을.
그리고 소중한 사람을 잃은 이 심정을. 언젠가는 알지도 모르겠지만.
아직 너는 모를테니까. 나는 쳇하고 혀를 찼다.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구요. 평소와 다르게 사시나무처럼 떨지말고." -소고
"................."
"그 검, 누가 만들어준거에요?
검은색 칼날은 들어본 적도 없다구요." -소고
누가 만들어준거냐고?
그 한마디에 나는 눈을 딱 감아버렸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
내게 처음 손을 내밀던 당신이. 그리고 내게 그 검을 주던 당신의 미소가.
불길 속에서 날 감싸고서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져가던 당신의 얼굴이.
그 따스함도, 미소도, 목소리도, 전부. 전부.
아직도 머릿속에서, 귓전에서 떠나질 않고 있어.
".........그냥 신경꺼."
"이 상황에서 어떻게 그래요." -소고
"아 제발. 300엔 줄테니까. 응?"
그렇게 계속해서 소고는 집요하게 물어왔다. 내가 천인이라도, 이해해줄까.
이때까지 그래왔듯이 따스하게 손을 잡아줄까.
그런 두려움이 사라질 만큼 나는 이제 그들을 믿는다.
그럼에도 말하지 못하는 건, 내 과거로 인해.
혹시라도 양이지사였던 내 과거로 인해 이들이 위험해질지도 몰라서일 뿐이다.
"근데 정말 말 안해줄거에요?" -소고
"몰라. 알아서 뭐하게?"
그래. 단지 그것 뿐인데.
"뭐.......그냥?" -소고
그 말에 다시 나는 눈을 감았다. 나름 배려하고 있는 걸까.
바람이 내 옆을 스친다. 여름의 산들바람이다. 엊그제가 봄 같은데.
엊그제가, 그분과 처음만난 봄 같은데. 벌써 20년 정도의 세월이 흘렀다.
소고도 이젠 나보다 키도 크고, 히지카타도 성장했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나 그대로 였던 걸까. 겉모습이 조금 성장한 것 외엔, 변한게 없어.
이 복수심도. 의문도. 슬픔도. 아픔도.
나는 그 태도에 아무렇지 않다는 듯 털털하고 시원스럽게 씨익 웃어보였다.
".........소중한 거야. 과거의 나에게 있던 것들 중 남은 건 이제 이것 뿐인걸."
그렇다. 나의 종족도 더 이상 이 세상엔 그 배신자 뿐이다.
이 검을 만들어준 그녀는 검은 연기가 되어 더 이상 흔적조차도 찾을 수 없다.
내가 처음으로 마음을 연 선생님은 이미 이 세상엔 존재하지 않는다.
믿었던 친구에게 이유모를 배신을 당했다.나머지 친구들과도 생이별을 했다.
다시금 이 사람들을 만나긴 했지만 예전의 그 사람들을 너무나 보고 싶었다.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언제부터였을까. 이렇게 어리광부리던 건."
하지만 그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기에,
그저 지나가버린 것을 붙잡고 지금의 것을
지키려 닌 내던지는 것이 지금의 나의 전부였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누군가가 치유해주거나
몸을 부숴서라도 벗어나는 방법 뿐이기에.
설령 치료하더라도 상처는 남기 마련이다.
"누님........." -소고
소고의 손이 내 볼에 와닿았다. 다시 뗀 그의 손가락이 젖어있었다.
아아, 바보구나. 나. 또 어느 순간 울고있었네.
동생 앞에서 이런 모습 보이는 거 꽤나 못나보이려나.
소고는 아무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채로 내 손을 잡아주었다.
이젠 나보다 큰 손으로 내 손을 잡아온다. 순간,
'긴토키, 신스케, 즈라, 타츠마, 모두.......'
친구들이 생각났다. 어렸을 땐 내가 더 컸지만, 점점 차이가 벌어져서
더 커져서는 그 손으로 내 손을 잡아주던. 그들이.
'보고싶어.........'
하지만 이이상 운다고 해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오랜전부터, 알고 있었잖아. 그런 것 쯤은.
나는 소고의 손을 잡은 손의 반대쪽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그와 똑같이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옅은 미소를 지어본다.
그녀의 눈물이 흐르듯, 비는 그렇게 시원하게 쏟아져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