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 우연이군, 소년. 그럼 잘 가게나. ”
어찌나 물 흐르듯 자연스레 말을 마치는지, 레오는 하마터면 자신이 오늘 하루 스티븐과 함께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할 거 다 한 뒤 헤어지는 그런 사이인 줄 알 뻔 했다. 물론 착각이었다. 스티븐과 레오는 오늘 처음으로 이제 막, 지금 막, 겨우 십 몇 초 전에 마주쳤다. 번화가 속 스티븐은 단정한 얼굴과 그에 잘 어울리는 네이비 색 헤링본 스트라이프 슈트 차림이, 가뜩이나 잘 생긴 사람이 라이브라에서 때 보다 훨씬 더 멋스러운 미남 느낌으로 H. L 에 섞여 있었다. 깔끔하면서도 말쑥한 모습이 붕괴 이전에 유행하던 패션 잡지의 표지 모델을 연상시켰다.
엇, 저 뒷모습은 스티븐 씨! 재프와는 정 반대의 의미로 훤칠한 인상의 그가 분수대 근처를 서성이는 것을 발견하고, 레오가 손을 들어 스티븐에게 아는 채를 한 것이 불과 십 몇 초전. 과연 매너 있는 어른인 그는 부드러운 인상을 상쾌하게 바꾸며 레오의 아는 척을 받아 주었다. “ 오. 우연이군, 소년. ” 그리고 마하의 속도로 덧붙이길 “ 그럼 잘 가게나. ”
“ ㅡ에 또, 저기, 저희 분명 지금 막 만난 게 맞죠, 스티븐 씨? ”
“ 그럼! 그러니 잘 가게나. ”
“ 아니 저기, 스티븐 씨…? ”
“ 그렇게 애타게 부르지 않아도 난 여기 있으니까.
그러니 난 상관 말고 자넨 어서 자네 갈 길이나 잘. 가게. 나! ”
금방이라도 페퍼민트 향이 풍길 것 같은 산뜻한 미소로 스티븐이 단호한 퇴출 령을 거듭 강조했다. …ㅡ에에엑?!?!!! 내심 스티븐을 라이브라 인원 중 가장 정상적인 남자라고 생각했던 레오는 평소와 다른 스티븐의 모습에 알 수 없는 기시감을 느꼈다. 비밀 임무, 비밀 임무신 건가!? 하지만 그렇다손 치기엔 오늘의 스티븐은 확실히 지나치게 멋졌다. 반들반들 윤이 넘치는 구두나 평상시와 비교해도 재질부터 다른 클래식 스타일의 맞춤형 정장은 도저히 임무를 수행하는 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애초에 스티븐 씨 오늘 비번이시고. 게다가 저 단호한 신비주의는 마치, 마치 꼭 비밀 연애를 숨기려는 남자 같지 않은가.
뭐, 어디까지나 비유가 그렇다는 거지만!
스티븐 씨가 그런 사람일 리 없지! 레오는 생각했다. 무언가 어른들만의 심오한 사정이 있는 게 분명하다.
“ 그럼 전 이만……. ” 쭈뼛거린 레오가 뒷머릴 긁적이며 막 자리를 피하려던 참이었다. 아, 그래그래. 모처럼 쉬는 날인데 어디 눈 먼 사고에 휘말리지 말고 조심히 들어가게! 배려와 후련함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얼굴로 레오에게 손을 흔들던 스티븐이 돌연 눈에 띠게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 나 참…그러게 빨리 가래도. ” 츠. 아쉽단 듯 짧게 혀를 끈 스티븐이 레오의 어깨를 잡아 멈춰 세웠다. “ 이미 늦었어. 그러니 그냥 여기 있게. ”
“ 예에?
늦었다니 그건 또 무슨ㅡ. ”
“ 스티븐 씨! ”
레오가 알기로 그것은 이제껏 스티븐을 가리키던 수많은 호칭들 중 가장 어리고 곱다란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