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렸다.

너를 놓은 그 날과 같이 주룩주룩 비가 내렸다.
시커멓고 흐린 하늘도, 창문턱에 떨어져 터지는 빗방울도 그 날과 너무나도 똑같아서 답지않게 한없는 우울함에 빠져들었다.

마음이 참으로 답답했다.

괜시리 방 안을 슥, 한 번 둘러보니 맘은 더욱 더 갑갑해져버렸다.


저 소파에서 너에게 곧잘 짜증을 내곤 했었어.
텔레비전 보는데 방해되니까 조용히 좀 하라고 하기도 했고... 잔소리 좀 그만 하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진짜 별 거 없는 것 가지고 서로 신경질도 냈고.
같이 앉아있어도 서로 얼굴도 제대로 안 본 채로 시간만 흘려보냈었다.


싸우다가 감정조절을 못해서 저기있는 화병을 쳐서 깨버린 적도 있었지.
내가 깬 화병을 네가 치우다가 손을 베였었는데.


한바탕 다투고 난 뒤에는 항상 나 혼자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쾅 닫아버리는 게 일상이었네.
바깥에서 네가 소리치다 지쳐서 훌쩍이다 가버리면 그제서야 나왔었다, 나는.


다시 되짚어보니 정말이지 생기없고 막막한 나날들이었다.
가만보면 그 다툼 자체보다도, 평소 서로를 향한 그 아무렇지도 않은 무관심이 가장 막막한 거였다.
익숙함에 깊이 빠져버린 나머지 우리는 모든 것을 당연하게만 여겼던 거였다. 막상 그 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와서 생각해봤자 무슨 소용이냐.


지끈거리며 아파오는 머리에 나는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다시 창가 쪽으로 숙여앉았다.


잘한 것이다.

잘한 것일 거다.

더 이상 질질 끌지않고 그만 너를 놓아준 것은 옳은 일이다.

최소한 너를 울리지 않을 녀석에게로 보내준 것은 옳은 선택일 것이다.

너도, 나도, 이미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으니까.


나는 혼자서 계속 중얼였다. 치졸한 자기합리화일까.
너와 헤어진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꼴사납게 후회같은 걸 하고싶진 않았다. 어쩌면 나는 어떻게든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경계하던 타카스기 녀석한테 허무하게 너를 보내버린 나를. 뒤늦게 이런 허전함과 아픔을 느끼는 나를.


폼이란 폼은 다 잡고 제멋대로 헤어진 주제에 이제와서 무슨 주책이냐.


눈을 감고 입을 다물어도 너와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것이 꼭 좋은 기억이 아니라, 다투고 싸웠던 안 좋은 기억들이라 할지라도, 눈 앞의 암흑 속에 계속해서 나타났다.
그리고 너의 울음기섞인 소리침, 한 시도 더 듣고싶지 않았던 잔소리마저도. 어째서인지 그리워졌다. 말도 안된다는 것을 알지만, 왜인지, 정말 왜인지, 그런 것들마저도 그리웠다.


"긴 상."


그렇게 인상을 찡그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방문쪽에서 장을 보러 갔던 신파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지 않은 채로 대충 대답했다. 왜.


"..오는 길에, (-)씨를 봤어요."


말을 꺼내기가 어색해 괜히 머리라도 긁적이는 듯, 신파치의 옷자락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잠깐동안, 그것도 언뜻 보긴 했지만 분명 (-)씨인 것 같았는데.."


눈을 감고 최대한 머릿속을 비우려 애썼다.


"우산이 없으신건지 어디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계시더라고요."


나는 이미 너에게 관여할 자격이 없다.


"...저.. 긴상."


고작 일주일 전에, 너와 나의 관계는 끝났다.


"제가 뭐라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우리 사이에 더 이상 연인이라는 칭호는 존재하지 않았다.


"괜찮으시다면,"


이쯤 되면 놓아주어도 괜찮겠지. 그런대로 살아가며 버틸 만은 하겠지. 하면서 마음 역시 접었던 나다.


"다시한번....생각해보시는 게 어떠신지..."


그런데.


"....."


그런데 어째서.


"...요 며칠 계속 날씨가 흐리더니, 오늘 비가 많이 오네요."


도대체 어째서.


"..추위 많이 타시잖아요, (-)씨."


어째서 나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는 것이냐.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그녀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