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스레 눈을 떠 시야를 되찾는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천장과 창 밖을 지나가는 광월한 우주.)
(이번엔 정말 현실로 돌아왔다.)

(너무 오랫동안 잠들었던 탓인지 이리저리 욱신거리는 몸.)
(이제 그만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호인 것 같다.)

부스럭 - .

("............")

(영원히 깨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텐데...)

(야속하게도, 언제나 꿈보다 강한 것이 현실이다.)

(나는 체념하듯 스탠드 앞에 놓여진 물컵으로 손을 뻗었다.)
(언제나 자기 전에 컵에 물을 받아놓고 일어나면 그 물을 마시는 것이 내 습관이다.)
(그런데...)

("...?")

(컵의 안을 들여다 보니, 오늘따라 이상하게도 물이 아닌 새빨간 액체가 담겨져 있다.)

(도대체 무슨 액체일까, 한동안 곰곰히 생각해보니)
(머지 않아 그 해답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설마... 피...?")

(비릿한 냄새에 진한 농도, 그리고 선명한 붉은색.)
(내가 아는 한 그런 액체는 딱 하나 밖에 없다.)

(순식간에 불길한 기운이 엄습해온다.)

똑똑똑 - .

(".....누구세요.")

카무이"나야."

("들어와...")

덜컥 - .

("............")

(문이 열리자, 방 안으로 들어서는 카무이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경직 된 표정과 날카로운 눈빛... 그다지 밝은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와 마주치는 순간부터, 팔다리가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왜냐고 묻는다면, 굳이 누군가에게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 펼쳐지고 있는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를.)

쨍그랑 - !!!

(진실을 깨닫는 순간, 나도 모르게 손에 들고 있던 컵을 바닥으로 떨어뜨려 버렸다.)
(갑자기 너무 놀란 나머지 컵이 손에서 미끄러진 것이었다.)

(컵은 산산조각이 나고, 그 안에 들어 있던 붉은 액체는 바닥 위에 화려한 원을 그리며 흩어졌다.)
(그리고 어느덫 내 가까이 다가선 그의 옷과 얼굴마저 붉게 물들였다.)

카무이".........."

(그는 내 앞으로 다가서서, 붉게 물든 카펫 한 가운데 떨어진 무언가를 손에 집었다.)
(그것은 컵 안에 들어 있던 액체로 새빨갛게 물든 작고 동그란 링.)
(매끄러운 경사를 통해 붉은 피가 흘러내리자, 본래의 은색 빛이 나타났다.)

("..............")

(어째서 저게 저런곳에...)
(설마...)

카무이"누구의 피인지... 알겠어?"

("카무이... 너...!")

(문득 흐릿한 영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순수해보이는 한 어린 소녀, 그녀가 내게 조심스레 손을 내미는 모습이...)

카무이"네가 반지를 건네준... 그 여자의 피야."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카무이"...그 여자는 누구 때문에 죽은 걸까?"

터벅 터벅 - .

(그는 내게로 가까이 다가와 내 어깨 위에 살며시 두 손을 얹으며 침대 위로 올라왔다.)
(그가 살며시 내게 밀착해오자, 하얀 침대시트가 아래로 푹 가라앉았다.)

카무이"내 진심을 짓밟은... 네 잘못이야."

("...............")

(아무리 이곳이 하루사메 안이고, 그가 최고권력자라지만)
(설마하니 나를 24시간 감시라도 하고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이마와 등에 식은 땀이 맺힌다.)

(너무나도 가까운 그의 두 눈을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끝내 고개를 돌리며 외면한다.)

카무이"...날 봐."

(그의 목소리 역시, 뒷골이 섬뜩해질 정도의 낮은 저음이다.)

(".........")

카무이"외면한다고 해서 이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아. 그러니까 날 봐. 어서..."

(".........")

(그의 위협적인 말투에 기가 죽어, 결국에는 그에게로 시선을 되돌린다.)
(그 순간 움찔, 하고 몸이 경련을 일으킨다.)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것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것보다 더 아찔한 기분이다.)

(내가 얌전히 말을 듣자, 아무런 말 없이 나를 내려다보는 카무이.)
(마치 죽음의 사신처럼, 그의 눈빛은 곧 피할 수 없는 비극이 일어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카무이"왠지 그립네, 이런 상황... 옛날 생각나지 않아?"

(".........")

(그의 말에 따라, 어느덫 내 머릿속에서는 뿌옇고 낡은 기억이 재생 되고 있었다.)
(그에 따라서, 그를 향한 나의 시선에 두려움을 간단히 제압한 증오의 감정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카무이"생각나는 모양이구나."

(마치 내 모습을 통해서 그리운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 그 가증스러운 모습에 자연스레 얼굴이 일그러진다.)

(흐릿해져버린 기억 하나 하나가 되살아날 때마다, 가슴에 진 응어리가 눈물로 새어나올 것만 같다.)
(그때만 생각하면 너무나 억울하고 분해서, 두 손에 힘이 들어간다.)

카무이"넌 분명 이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그때의 모든 것이 네 삶을 망가뜨렸다고..."

(문득 그의 표정도 나와 같이 매섭게 변했다.)

카무이"...그건 잘못 된 생각이야. 왜냐면 그때 망가져버린 건 네가 아니라 나거든.

그때나 지금이나 넌 깨끗하고 아름다워...

그래,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 난 이렇게나 망가져버렸는데..."

(그의 뜨거운 이마가 자신의 이마에 닿아온다.)
(우리는 지금 서로의 숨결이 살갗에 닿을 정도로 밀착하고 있다.)

(나의 어깨를 점령 하고 있던 그의 손이 살며시 살갗을 타고 흘러내린다.)
다섯 번째 이야기40